<2015 제 51호 속기계 발췌>
국회 속기사로 근무한 지 몇 개월 정도 지났지만 사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2014년 국회사무처 의정기록과 새내기로 합격수기를 쓰게 되니 오늘에서야 막연하게 키워 왔던
국회 속기사의 꿈을 이뤘다는 실감이 난다.
처음 속기를 시작하게 된 것은 우연한 계기였다. 군 제대 후 진로를 찾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었고
친구를 따라간 속기학원을 통해 우연히 속기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평소 타자에 관심도 없고 속도도 빠르지 않았던 내가 속기를 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했지만
일반 2벌식 키보드와는 다른 방식이어서 오히려 처음부터 시작한다는 마음으로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기로 마음먹고 속기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실력이 좋아졌고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자신감도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속기에 빠졌던 것 같다.
누구나 그렇듯 슬럼프가 찾아왔다.
빠른 낭독에 적응하기가 힘들었고 학원에서 매일 보는 실기 모의고사 점수를 확인하는 시간이면 6개월 넘게 향상이 되지 않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아무리 연습해도 제자리걸음이었고 빠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할 것 같아서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많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될 때까지 한다는 각오로 끊임없이 연습했고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빠른 기간에 우수한 성적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1급 자격증을 취득하기까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단기간에 3급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오면서 나도 모르게 자만했었고 결국
당연히 붙을 것으로 예상했던 3급 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실패의 원인을 찾기 위해 평소 잘못된 행동이 있는지 천천히 생각해 봤다.
빨리 1급을 따고 싶다는 생각에 정확도를 소홀히 하고 빠르게 치는 것에만 열중해서 연습했던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던 것 같다.
다음 시험에서 무조건 1급을 취득해 원래 목표였던 1년 안에 1급 자격증을 취득하기로 마음먹고
속기 연습에 매진했다.
이제는 완벽하게 준비됐다고 생각할 때쯤 시험을 봤고 시험이 끝난 후 당연히 합격할 것으로 예상했다.
저녁 12시가 넘어서 합격자 발표가 났는데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절망감에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새웠다. 아침이 되자마자 점수를 확인하기 위해 전화를 했는데 알고 보니 담당자의 실수로 합격을 불합격으로 잘못 처리한 것이었다.
바로 정정을 해 주겠다는 말에 계속 ‘감사합니다’라는 말만 되풀이한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1급 자격증을 취득하니 내가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좋지 않거나 아무 변화가 없다고 해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 하다 보면 결국 난관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급 자격증을 취득한 후에 바로 국회를 준비한 것은 아니었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나니
속기사로 실제 현장에서 근무하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많았고, 먼저 실무 경력을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국회 속기사가 되겠다는 꿈은 있었지만 짧은 기간에 합격하기란 너무 어려워 보였고
일단 취업을 하고 나서 공부를 병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다행히 ‘게임물등급위원회’라는 공공기관에 바로 취업이 돼서 드디어 속기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처음에는 게임물등급위원회가 무엇을 하는 데인지도 모르고 시작했지만 1년 3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속기사로 근무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우리나라에서 출시되는 모든 게임을 사전에 심사해서 적정 연령을 정하고 여러 가지 폭력성이라든가
선정성을 체크해서 등급을 분류하는 회의에서 속기를 하는 것이 주 업무였다.
내가 작성한 등급분류 회의록은 경찰, 검찰, 각 지자체, 소비자, 업자 등이 모두 열람할 수 있도록
공유되었기 때문에 한 글자도 이상이 없도록, 또한 최대한 빨리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다.
내가 배운 속기가 이렇게 보람된 곳에 쓰인다니 뿌듯했다. 이곳에는 속기사가 2명이어서 회의 2개가 동시에 열릴 경우에는 혼자서 긴 시간 동안 현장에서 속기를 하였고 회의에 필요한 자료 준비까지 모든 진행을
도맡아서 하였다.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하던 중 국정감사 기간에 피감기관으로 국회에 파견을 나가야 되는 일이 있었는데
국회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를 긴장하게 했다. 회의장 화면을 보면 가끔 국회 속기사의 모습이 나왔고 나도 국회 속기사가 되어서 현장에서 직접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이 더욱 커졌다.
물론 근무하면서 보람된 일도 많이 있었지만 이제는 꿈꾸어 왔던 국회를 목표로 공부를 해야 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쉽사리 다니던 곳을 그만둘 수는 없어서 일을 병행하면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출퇴근 시간이 길어서 버스나 지하철에서 짬짬이 공부를 했다.
시험 날은 다가오는데 아직 진도를 다 나가지 못한 과목이 3개나 있었고 하필 그때 회사도 바빠서
시간을 내서 공부하기가 더욱 힘들었다.
결국 제대로 공부도 하지 못하고 2013년 시험에서 떨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시간을 허비한 것 같다.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더 이상 후회하지 않기 위해 과감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음 시험까지 1년 동안 공부만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직장을 그만두면 공부만 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쉬지 않고 공부만 하기란 쉽지 않았다.
합격을 하려면 필기와 실기를 모두 준비해야 되는데 2013년에 필기에서 한 번 떨어지고 나니
실기를 준비해도 필기에서 떨어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우선은 필기만 생각하기로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인터넷 강의로 이론을 공부하고, 어차피 문제를 푸는 시험이기 때문에 기출문제를 푸는 데
시간 투자를 더 많이 했다.
같은 이론 강의를 여러 번 들어서 개념을 완벽하게 하려는 것보다 오히려 1회독만 해도
기출문제를 풀면서 모르는 것을 다시 찾아보면서 공부하는 게 기억이 더욱 오래갔던 것 같다.
이론만 공부하고 문제를 풀다 보면 두려운 마음이 많았는데 문제를 많이 풀면서 푸는 속도도 빨라지고
문제를 읽고 어떻게 접근해야 되는 건지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공부를 하던 중 국회 속기사 채용공고가 떴다.
다행히도 적지 않은 5명이었다. 떨어져도 다음 시험이 있다고 생각하면 절실하지 않을 것 같아서
이번이 마지막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했다.
필기시험 당일은 생각보다 떨리지 않았다.
작년 시험에서 시간 내에 다 풀지 못한 기억이 있어서 모든 문제를 다 풀어야 한다는 생각에
시간 배분에 신경을 많이 썼다. 필기시험이 끝나고 잘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인지 후련함보다는
2차 실기시험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실기에 자신은 있었지만 필기공부를 하는 동안
아예 연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짧은 기간에 다시 감각을 찾아야만 했다.
얼마 후 다행히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본격적으로 학원에서 실기 준비를 하려고 했으나 실기시험까지
날짜가 촉박했기 때문에 집에서 뉴스를 속기하면서 준비를 했다.
뉴스로 연습하면 요즘 이슈가 되고 있는 내용들을 파악할 수 있었고 국회 관련된 뉴스가 나오면
더욱 집중해서 속기를 했다.
실기시험은 긴장한 상태에서도 평소 실력이 나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연습할 때도
실제 시험이라고 생각하고 긴장감 있게 연습했다.
시험 당일에는 시험장에 온 누구를 이긴다기보다 혼자 실제 현장에서 속기를 한다고 생각했고,
그러면서 한결 편안한 마음을 갖게 됐다. 거기에다 실기 내용도 최근 다루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이슈가 나왔기 때문에 뉴스를 보면서 속기 연습을 했던 것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마지막 단계인 면접은 실기시험 합격자 발표 후 얼마 시간이 주어지지 않아서 촉박하게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속기직 면접 기출 자료를 보기보다는 자기소개서에 있는 내용과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표현하기로 했다.
면접 당일 모든 직렬 중에 내가 첫 번째여서 긴장할 시간도 없이 바로 들어가 면접을 시작해야 했다.
그래서 그런지 떨지 않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에서 나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이야기했고
여러 질문에 대해서도 평소에 갖고 있던 나의 생각을 꾸밈없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그렇게 정신없이 면접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최종 발표가 6시가 다 돼서야 나왔는데 그때까지 마음 졸이며 있던 순간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합격자 명단에 내 수험번호가 첫 번째에 있었다. ‘91000035’, 아직도 그 번호를 잊을 수가 없다.
어느덧 3주간의 연수를 마치고 의정기록과에 배치되어 근무한 지 이제 3개월이 되어 간다.
짧은 기간이지만 한 가지 느낀 것은 다른 일을 오랫동안 하면 완벽에 가깝게 할 수 있지만
속기는 하면 할수록 어렵다는 것이다. 발언한 것을 발언한 대로 두어야 되는지 아니면 빼야 되는지부터 시
작해서 조사나 문장부호 하나만 틀려도 의미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고민하고 생각해야 될 것들이 많지만 중요한 것은 그렇게 고민을 해서 회의록을 작성해도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 참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바꿔서 생각하면 경력이 쌓이면서 능숙하게 할 수 있는 일은 거기에 안주하기 쉽고
무료함을 느끼기 쉽지만 속기사는 끊임없이 공부하고 생각하고 고민해야 된다는 점이 힘들긴 해도
나 자신을 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직업이라 생각한다.
현재 국회 속기사를 목표로 준비하는 분들에게 국회 속기사는 힘든 만큼 우리나라의 역사와 함께하고
국민들을 위해 봉사하는 일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도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작성일 : 16-05-11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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