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12-11-26 09:15
[시사매거진] 속기사 취업설명회 르포
 글쓴이 : 광주속기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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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는 단순히 말을 받아쓰는 직업이 아닙니다”
스마트 세상, 주산과 타자기는 사라졌지만, 속기사는 부흥할 것
 
속기사.jpg
 
2012년 11월 20일 (화) 12:51:24
정대근 기자 korea8008@gmail.com
 최근 휴대폰을 바꿨다. 사과모양으로 유명한 미국의 IT회사에서 만든 최신형 모델이다. 신제품이 나올 때마다 새로운 기능을 한두 가지쯤 추가하기 마련인데, 유독 신기한 게 눈에 띄었다. 이른바 ‘스마트 비서’라 불리는 프로그램인데, 화면 터치나 자판조작 등 손동작이 아닌 ‘말’로 물으면, ‘말’로 대답해 주는 기능이다. 심지어 음성필기까지 가능해서 굳이 자판을 두드리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게 됐다. 글쓰기를 직업으로 하는 필자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직까지는 간단한 메모 수준의 입력이 가능한 정도였다. 단어를 아예 인식하지 못하거나 오타를 내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래도 희망은 분명해 보였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말로 글을 쓸 수 있게 되는 날이 오면 지긋지긋한 직업병인 척추질환과도 작별하게 될지 모를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말을 받아쓰는 휴대폰에 흠뻑 빠져 지내던 터라, ‘속기사 취업설명회’ 취재가 조금 생소하게 느껴졌다. 컴퓨터의 대중화와 함께 완전히 사라져 버린 주산이나 타자기를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행사장을 가득 메운 1,000여 명의 현직 및 예비 속기사들이 뿜어내는 열기를 느끼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망해 가는 집일수록 사람의 왕래가 적은 법인데, 행사장 통로는 물론이고 뒷자리에 선 채 설명회를 듣는 사람들의 눈빛이 심상치가 않았다. 심지어 사단법인 한국스마트속기협회 홈페이지 게시판에는 참가인원 제한에 걸려 설명회에 참가하지 못한 예비 속기사들의 원망(?)어린 목소리들이 가득했다. 이는 분명 흥해도 한참 흥할 잔칫집 분위기였다.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는 유망직종
지난 11월17일 대한상공회의소 의원회의실에서는 사단법인 대한속기협회가 주최하고, 사단법인 한국스마트속기협회가 주관한 ‘2013 속기사 취업설명회’가 열렸다. 심준구 속기사(KBS 3라디오, 극동방송 MC)의 사회로 열린 이날 설명회에는 이경식 사단법인 대한속기협회 이사장(국회 사무처 의정기록1과장), 안정근 한국스마트속기협회 및 한국자막방송기술협회 회장 등 국내 최정상급 속기사와 취업을 원하는 현직 및 예비 속기사 약 1,000여 명이 참석했다.
두 시간을 넘겨 진행된 설명회는 국내 속기직종의 현황과 전망을 간결하면서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알찬 프로그램으로 꾸며졌다. 국회, 검찰, 지방의회, 대학, 자막방송사 등 각 분야에서 10년 이상 활동하고 있는 현직 속기사들이 강사로 나서 해당 분야 속기사들이 갖추어야 할 소양과 능력 그리고 취업요건에 대해 꼼꼼하게 짚었다.
이경식 사단법인 대한속기협회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속기를 활용하고 있는데, 가장 활발하고 왕성하게 활동하는 국가가 바로 우리나라”라며 속기 강국 대한민국의 자부심을 고취했다. 또한 이 이사장은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매년 속기사 공인 자격증 시험을 실시하는데, 1급을 취득할 경우 80% 이상이 취업이 가능하며, 공무원, 자막방송, 사회복지, 검찰청, 대학교 등 그 분야도 다양하다”고 강조했다.
안정근 한국스마트속기협회 및 한국자막방송기술협회 회장도 축사를 통해 “자격증이나 면허증을 필요로 하는 직종이 570가지 정도 되는데, 자격증이 없어도 사회생활이 가능하지만 이에 파생되는 직업이 약 12,000가지 정도 된다”며 “이 중 속기사라는 유망 직종을 선택한 참가자 여러분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 회장은 “수해를 입은 지역은 온통 물이 넘치지만 정작 사람이 마실 물을 찾기는 어려운 법”이라며 “치열한 취업전쟁터에서 속기사라는 단물을 선택한 참가자들이 당당한 현장의 속기사가 되어 동료로서 얼굴을 맞댈 수 있기를 소망한다”고 덧붙였다.
 
“속기는 단순히 말을 받아 쓰는 일이 아니다”
이어 본격적으로 진행된 설명회에서는 이경식 이사장이 첫 번째 강사로 나서 국회 소속 속기사가 갖추어야 할 덕목과 채용절차 등에 대해 설명했다. 특히 이 이사장은 “국회에서는 매년 많게는 10명 이상, 적게는 3~5명씩 매년 속기사를 신규 채용하고 있다”며 “속기사를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국회로의 입성을 과감히 도전해 볼 것”을 강조했다.
부산광역시의회에서 근무하며 속기경력 20년차로 활동하고 있는 장성수 속기사는 지방의회 속기직종의 전망에 대해 소개했으며, 일반직 공무원으로 분류되는 국회 소속 속기사와 기능직으로 분류되는 지방의회 속기사가 곧 일원화 되어 일반직 공무원으로 전환되는 정책이 준비되고 있는 시점이므로, 상대적으로 진입이 쉬운 지방의회 속기사직에 도전해 볼 것을 권유하기도 했다. 특히 장 속기사는 “현장에서 근무하다 보면 일부 의원들이 회기 중 발언한 내용을 수정해 달라는 부탁을 해오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절대 용납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는 “속기사가 행하는 기록행위는 곧 역사적 자료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과 투명성이 가장 중하며 이 원칙을 어기는 순간 사료로써의 가치를 잃게 된다는 점을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검찰청 서울남부지원에 근무하고 있는 장현아 속기사와 자막방송 경력 14년차를 넘기고 있는 최기예 속기사는 지난 2009년 베이징에서 열린 인터스테노 한국대표로 참가한 바 있는 그야말로 국가대표 속기사다. 이들은 유능한 속기사로 활동하기 위해서는 투철한 사명감을 바탕으로 하는 끊임없는 자기 공부가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특히 시시각각 등장하는 신조어를 끊임없이 주시하고, 뉴스와 신문을 통한 시사상식을 충분히 갖춰나갈 것을 권하기도 했다.
김점동 사단법인 대한속기협회 이사(동우S&C 대표)는 프리랜서로서의 속기사의 요건과 덕목에 대해 장시간 강의했다. 수필속기부터 시작해 수십 년 동안 속기사로 활동해 온 김 이사가 강조하는 것은 끊임없는 자기관리를 통한 실력향상이었다. 그 어떠한 사명감도 실력을 바탕으로 하지 않는 활동은 그 의미가 반감된다는 것이었다.
끝으로 한국복지대학교에서 11년째 수석지원사로 근무하고 있는 차은영 속기사는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속기론’을 펼쳐 큰 박수를 받았다.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들에게 강의지원을 하고 있는 차 속기사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속기는 단순히 말을 받아 글로 옮기는 기능사가 아니라는 점”을 언급하며 “장애를 갖고 있기 때문에 다를 수밖에 없는 언어와 문화 그리고 정서를 이해하고 배려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날 강단에 선 선배 속기사들이 공통적으로 강조한 것이 있었다. 말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다. 감정과 정서가 배어 있는 삶 그 자체라는 점이었다. 물론 속기사가 신속하고 정확하게 속기를 해내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이보다 중요한 것은 각종 스마트 기계가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사람의 냄새가 듬뿍 담긴 ‘말’을 기록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명회장을 나서며 필자는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스마트 비서에게 물었다. “너는 오늘 어땠니?” 그러자 스마트 비서는 “오늘 날씨를 검색할까요?”라는 동문서답을 내놨다. 사람의 마음과 삶을 읽어낼 수 있는 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이 개발되는 날이 있을까? 아마도 그날이 오기까지 이 땅의 속기사는 이 땅의 역사를 기록하는 사관(史官)이자, 청각장애인들의 든든한 지원자로 건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